the blue of distance (먼 곳의 푸름)
“우리가 ‘롱잉 longing 이라는 말에 갈망이라는 뜻을 담은 것을 욕망 속에는 가없는 거리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푸름은 내가 영영 도달할 수 없는 먼 곳, 그 푸른 세상에 대한 갈망의 색이다.
어쩌면 거리를 좁히고 싶다는 마음 없이 그냥 거리를 바라보기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가 영영 차지할 수 없는 푸름의 아름다움을 그럼에도 소유할 수 있는 것처럼, 갈망도 그런 식으로 소유할 수 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그런 갈망의 어떤 측면은 꼭 먼 곳의 푸름과 같아서, 우리가 그것을 획득하거나 그것에 도달하더라도 결코 충족되지 않으며 그저 위치만 바뀌기 때문이다. 우리가 저 멀리 푸른 산에 도달하는 순간 그 산은 더 이상 푸르지 않고 대신 푸름 이 그 너머의 산을 물들이는 것처럼. 비극이 희극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미스터리, 어떤 슬픈 노래들과 이야기들이 크나큰 기쁨으로 느껴지는 미스터리가 또한 이 언저리에 있는 일이다. 무언가는 늘 먼 곳에만 있다.
글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나는 인생의 대부분을 아이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나를 형 성했던 힘들이 아직 생생하고 강력했다. 이후 시간과 함께 기억들 은 대부분 희미해졌고, 내가 그중 하나를 글로 적을 때마다 그 기억은 버려지는 셈이었다. 그 순간 기억은 그림자처럼 흐릿한 추억 으로서의 생을 마감하고 활자로 고정된다.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게 된다. 살아 있는 것 특유의 유동적이고 불안정한 속성을 잃는 다.
내가 역사가가 된 것은 내게 역사가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진실이 통 붙잡기 어려운 것으로 통하는 가족 속에서 진실을 말하는 데 흥미가 있어서이기도 했다고. 진실을 말하는 최선의 방법은 자신이 어떤 사실들과 권위 있고 객관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과 목표를 털어놓는 것이다. 진실은 사건에 있지 않고 희망과 욕구에 있는 것이므로. 내가 그동안 써온 역사들은 숨겨진 것, 잃은 것, 간과된 것, 너무 폭넓거나 형체가 불분명하여 사람들의 레이더망에 잡히지 못했던 것일 때가 많았다. 그 역사들은 특정인이 소유한 깔끔한 밭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소유되지 않았으며 많은 밭을 통과하여 구불구불 난 길이나 물길이었다. 특히 예술의 역사는 거의 구약성경의 족보처럼, 즉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 말이 줄줄이 이어짐으 로써 화가는 화가에게서만 태어난다고 말하는 듯한 방식으로 이 야기되곤 한다. 부계만 따지는 구약성경의 계보가 어머니들은 물론이거니와 어머니들의 아버지들도 누락하는 것처럼, 그런 단정한 예술사는 화가들이 다른 매체와 다른 접촉으로부터 얻은 자료 와 영향을 누락하고, 시와 꿈과 정치와 의심과 유년기의 경험과 장소의 감각으로부터 얻은 자료와 영향을 누락하며, 역사는 직선보다는 교차로와 갈라져 나간 가지와 뒤엉킨 매듭으로 만들어진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을 누락한다. 나는 그런 다른 영향들을 할머니들이라고 부른다.
과거를 잊는다는 것은 물론 무언가를 상실했다는 감각마저 잃는 것이다. 그런데 상실의 감각이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풍요로움에 대한 기억이자 우리가 현재에 길을 찾도록 도와줄 단서들에 대한 기억이기도 하므로,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익혀야 할 기술은 과거를 잊는 기술이 아니라 손에서 놓아주는 기술이다. 그리고 우리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 우리는 그 상실 속에서 풍요로울 수 있다.
영화는 빛뿐 아니라 어둠으로도 만들어진다. 우리가 수많은 이미지들을 모아서 하나의 활동사진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환 하게 정지된 이미지들 사이사이에 몹시 짧은 어둠들이 끼어 있기 때문이다. 그 어둠들이 없다면, 보이는 것은 흐릿하게 번진 영상뿐 일 것이다. 그렇다면 장편 영화 한 편에는 우리가 못 보고 지나가 는 순수한 어둠이 삼십 분에서 한 시간 정도 포함되어 있다는 뜻 이다. 그 어둠들을 다 합할 수 있다면, 극장에서 관객들이 그 깊은 상상의 밤을 다 함께 응시하는 광경이 만들어질 것이다. 그것은 영 화의 테라 인코그니타, 모든 지도에 있는 검은 대륙이다. 이와 비슷하게, 달리는 사람의 발걸음은 한 걸음 한 걸음이 도약이라서 그 는 순간적으로나마 땅에서 완전히 떠 있게 된다.
우리는 예외를 법 칙으로 믿는 것 같다. 일반적으로 잃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지 않 고,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그야 우리가 숲속 의 헨젤과 그레텔처럼 뒤에 흘리며 살았던 물건을 하나하나 쫓아 간다면 마땅히 돌아가는 길을 찾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 물건 들은 우리를 과거로 감아 당기면서 상실을 하나하나 복구해줄 것 이다. 잃어버린 안경에서 출발해서 잃어버린 장난감을 거쳐 잃어 버린 유치까지 돌아가는 길이 되어줄 것이다. 그러나 실제 대개의 물건들은 되찾을 수 없는 과거의 비밀스런 별자리를 이룰 뿐이다. 꿈꾸는 사람 외에는 아무것도 사라지지않는 꿈속에서나 우리에 게 돌아올 뿐이다. 그래도 그것들은 어딘가에는 존재해야 한다. 주머니칼과 플라스틱 목마는 완벽하게 퇴비로 바뀌지는 않는다. 하지만 한없이 표류하다가 세상 여기저기에 흩어지는 물건들의 거 대한 흐름 속에서 그것들이 어디로 갔을지, 누가 알겠는가?
나는 그의 의견을 이후 오래 곱씹었다. 이런 의미의 상실에 서는 두 가지 흐름이 뒤섞인다. 하나는 내가 역사가로서 모든 것에 매달리고 싶고, 모든 것을 적어두고 싶고, 모든 것을 스르르 사라 지지못하도록 막고 싶은 갈망이다. 그리고 거의 잊혔던 무언가를, 영영손 닿지 않는 곳으로 사라질 뻔했던 무언가를 자료와 인터뷰 에서 도로 끄집어냈을 때 역사가가 느끼는 기쁨이다. 그러나 또 다 른 흐름은 우리 시대에 너무 많은 것이 그것을 대체할 것도 없는 상황에서 속속 사라지는 현실을 내가 남들과 똑같이 겪는다는 점 이다. 어느 순간이든 지상의 어느 곳에서는 태양이 지고 있고, 또 한 번의 하루가 대체로 기록되지 않은 채 스르르 사라지고 있고, 사람들은 깨어나서는 거의 기억도 못 할 꿈속으로 스르르빠져들 고있다. 그런 상실이 지속 가능하고 자연스러운 것이 되려면 반드 시 풍부함이 면면히 지속되고 있어야만 한다. 태양은 앞으로도 뜨 겠지만, 꿈도 언젠가는 바닥을 드러낼 수 있는 법이다.
“세상 만물은 원래 사라지는 것이 섭리이지, 살아남는 것이 섭리가 아니” 므로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피할 수 없는 일이라서 슬프지만, “세상 의 어떤 것은 영영 잃어버린 상태일 때만 우리가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슬픈 와중에도 아름답다. 이것은 기어코 붙잡아서 손에 넣으려 하지 않고 거리를 둘 때만 보이는 풍경, 멀리 있어야만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 먼 곳 의 푸름이다.
그런데 솔닛은 이런 길 잃기를 이야기하다 말고 길을 잃는다. ‘잃다
(lost)의 또 다른 의미인 ‘상실’로 생각이 자유롭게 건너간다. 그래서 문득 문득 기억을 잃는 것, 과거를 잃는 것, 사랑을 잃는 것, 물건을 잃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는데, 이런 ‘잃음’의 이야기들은 ‘길 잃음’의 이야기들과 는 달리 슬프다. ‘길 잃음’의 이야기들은 어떤 면에서 우리가 아는 세상이 더 넓어지는 모험의 이야기들이지만, ‘상실’의 이야기들은 가령 되찾을 수 없는 연인이나 지구에서 사라지는 동식물처럼 무언가가 우리의 세상에서 영영 사라지는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상실은 아름답다. 슬프지만 아름답고, 슬프기에 아름답다.
솔닛은 또 답한다. 길을 잃는 일에 왜 길잡이가 필요하느냐고요. 왜냐 하면 우리는 미지의 바다에서 앎을 건져낸 뒤에는 비록 떠났던 곳과는 다 르더라도 다시 항구로 돌아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길을 잃음으로써 달라 진 시야를 자신의 삶 속에 받아들이는 단계에 이르러야 하지, 그러지 못 하고 영영길 잃은 상태로만 남는 것은 미지의 바다를 항해하여 새로운 대륙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바다에 삼켜지는 것, 혹은 좌초하는 것 이기 때문입니다.